새벽 다섯 시 아니 여섯 시쯤이었으려나. 창은 밝은 회색빛으로 방을 밝혔고,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집에 콕 박혀서 지내야지 싶어서, 다시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을 더 자고는 핸드폰 진동이 울려서 잠에서 깼다. 정현의 문자였다. 오늘 한림에서 열리는 오픈 스튜디오 행사 소식을 전하며 관심이 있으면 놀러 오라는 초대 연락. 문자를 가만히 보다가 귀를 세우니 빗소리가 잦아들긴 했었다. 날씨를 검색하니 흐리긴 하지만 비가 많이 오지는 않을 듯싶었다. 몸을 일으키고서 점심을 먹고, 빨래를 하고, 다시 날씨를 찾아보니 확실히 비가 더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지도 앱으로 길을 볼 수 있게 거치대에 핸드폰을 올려놓고서 스로틀을 당기며 출발했다. 도심을 벗어나 주변 풍경은 풀과 나무로 가득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는데, 혹시 비가 올까 싶어서 서둘렀다. 30분을 달렸을까. 주변에 목장이 드문드문 보이고 풀 냄새가 났다. 말이 풀을 뜯어 먹고 있는 풍경, 풀이 나무를 덮어버린 원시림 같은 풍경, 짙은 회색의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나오는 풍경, 여행객 두 명이 천천히 걷는 모습, 버스 정류장에서 외국인이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을 지나니 미술관옆집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관계자분이 반겼다. 미국에서 온 얄비 코노넨의 오픈스튜디오였고, 작가의 말을 통역해 주셨다. 작가는 종이를 오려서 풍경에 설치하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현장에서는 직접 제작한 종이 설치물을 볼 수 있었고, 작업실 한 곳에서는 그간 작업했던 사진 아카이빙을 모니터로 볼 수 있었다. 이것저것 말하고 묻고 싶었지만, 영어가 서툴러서 그냥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작업을 보고 나서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분들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오랜만에 겪는 분위기였다. 작업자들이 모이면 느껴지는 기운이 있다. 대화의 소재도 그렇고, 각자의 머릿속이 복작복작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반가웠지만 반가운 만큼 그 시간에 온전히 머물렀나 싶기는 했다. 맥주를 주셔서 맥주 마시는 것에 더 집중한 기분이 든다. 언젠가 또 만나서 이야기 나눌 일이 생기겠지. 떠나기 전까지 얄비 코노넨에게 작업을 본 소감이라도 전해야지 싶었는데, 결국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은 어두웠다. 해는 지고, 시골 도로에 차는 없었다. 제법 긴 길이었는데, 아무도 없었고 가로등도 없었다. 주변은 캄캄했는데, 무섭기보다는 신이 났다. 아무도 없는 길을 쌩쌩 달리면서 어두운 풍경에서도 흐릿한 형체를 구경했다. 나무인가 싶은 것들, 펜스인가 싶은 것들, 돌인가 싶은 것들, 풀인가 싶은 것들, 뭔지 모르지만, 그것인가 싶은 것들이 어둠 속에 흐릿하게 자리 잡았다. 큰 도로로 나오자, 차들이 늘었고, 이제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의 형체가 또렷해졌다. 집에 도착해서 오늘은 일기를 써야지 싶었는데.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