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과 구원

예전에 ㄴㄹ가 <그리스인 조르바>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들려준 얘기가 떠오를 때가 있다. 정확한 문장은 모르지만 대충 들었던 내용을 더듬어서 기억하자면 이렇다. '나는 타락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사랑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 더 좋을 정도로 타락했다.' 나는 바다에 들어가는 것보다 바다에 관한, 바다를 소재로 글 쓰는 것이 더 좋아져 버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문장에서 언급한 '타락'과 내 상태가 과연 가까운 감각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이것이 스스로를 파괴할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을지라도 지난 과거와 지금의 나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는 '타락'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타락한 영혼은 어디로 흐르는 걸까. 구원은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 구원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번 여행에서 아직 한 번도 바다에 들어간 적이 없다. 7월 4일이 되면 비행기를 타고 원래의 곳으로 향한다. 과연 남은 이틀간 바다에 들어갈 수 있을까.

처음 바다에 들어간 기억은 중학생 때다.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강화 동막 해수욕장을 향했다. 뻘이 있으니, 바닷물은 혼탁했다. 그런 바다에서도 물장구를 치고, 헤엄을 치고, 튜브를 타고 놀았다. 한 친구는 숙소에서 스크램블에그를 해주기도 했다. 당시 바다의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냄새 역시 모르겠다. 온도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차가웠을까. 미지근했나. 피부도, 혀도, 코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바다를 나는 무엇으로 기억하고 있나. 눈으로 보았던 장면이 멋대로 편집되어 머릿속에 떠다닌다. 차라리 다 잃으면 좋을 것을, 눈은 저 혼자 비겁하게 찌꺼기를 남겼다. 이런 찌꺼기들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나를 타락시킨 것일지 모른다. 차라리 모든 것을 상실하면 다시 처음부터 느끼면 될 텐데.

추억은 현재의 길을 잃게 한다는 점에서 타락이고, 상실은 나를 새롭게 걷게 하는 점에서 구원이다. 찌꺼기처럼 쌓인 추억은 끊임없이 상실되어야 할 것 아닐까. 하지만 추억은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남으며, 상실은 고독한 감정만 부추기니, 나는 영원히 타락하는 존재일지 모르겠다. 바다를 사랑으로 읽어도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