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5월27일

24일 아침부터 낮
제주행 비행기 탑승. 점심때라서 배가 고팠지만, 워크숍 일정이 빠듯해서 버스 타고 이동. 숙소에 도착하니 참가자 5인이 원형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착석. 배가 너무 고파서 진행자에게 먹을 것 요청…. 과자와 견과류를 먹으면서 워크숍에 참여했다.
몇 주전이었더라. 정근이 집에 와서 자신이 쓴 지원 사업이 선정되었다면서 이번 워크숍에 섭외 요청을 했다. 기획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놀 수 있는 TRPG 게임을 만들어서 함께 놀아본다는 취지로 기억한다. 이번 워크숍에는 저시력자 참가자 2인을 포함해서 총 6인이 자리에 둘러앉아서 간단한 자기소개 후 게임을 진행했다. 진행자는 1박 2일간 진행되는 게임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는데, 그때 문득 소년탐정 김전일이 떠올랐다. 밀실에서의 게임,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흥미롭고 축축한 분위기가 떠올랐달까.


24일 저녁부터 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김전일에 관한 생각은 잠깐뿐이었고, 게임은 꽤나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팀을 나눠서 진행되는 게임에서는 팀원과 함께 논의하고, 전략을 구성하고, 플레이를 하기도 했고, 다음날 진행될 게임에서 사용될 더 많은 칩을 가져오기 위해 노력했다. 플레이어 중 저시력자가 있기 때문에 게임 진행 중에는 핸드폰이나 메모를 할 수 없고, 오로지 음성으로만 게임을 설명하고 진행했다. 
첫날의 모든 게임이 종료되고 나서 저녁 식사를 했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다…. 정근이 직접 요리를 해줬는데, 기가막혔다…. 역시 최고의 요리사…. 메뉴는 돼지고기 덮밥과 당근라페. 냠냠.
게임을 끝내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유로운 시간에는 사람들이 움직인다. 담배를 피우러 우르르 나가고, 소파에 앉아서, 침대에 누워서 휴식을 취한다. 각자 작업하는 것을 꺼내 들고 자기 일에 시간을 쓰기도 하고, 각자의 행동 사이로 대화도 끼어든다. 묻기도, 대답하기도, 웃기도, 자연스레 이 시간이 지나면서 술 마실 준비를 한다. 사람들이 모이면 술이지 뭐…. 정근은 맥주와 안줏거리로 쓸 과자를 잔뜩 사 왔다. 며칠 지나고 생각하는데, 술 마시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나 가물가물하다. 다만, 과반이 넘는 사람들이 공연계에 있다 보니 그런 작업 얘기를 했던 것도 같고, 낯선 이가 있으니, 각자의 성향을 알게 하는 정보도 교류가 됐던 것 같고, 한참 맥주를 마시며 떠들고 떠들었다. 헛소리도 많이 했던 것 같고, 아 연애 얘기도 했다. 연인이 한 쌍 있어서 그랬는지, 자연스레 연애 관계에 관한 얘기도 꺼내졌고, 술도 마셨고, 또 마시고, 계속 마시고, 누군가는 방으로 들어가서 잠에 빠지고, 남은 사람들은 말하고 듣고 웃고 다시 술 마시고, 또 누군가는 침구를 깔고 잠에 들고, 남은 사람들은 말하고, 듣고, 웃고, 다시 또 술 마시고, 맥주가 다 떨어지니, 요리용으로 쓰려던 사케를 까서 마시고, 말하고 듣고, 웃고, 또 술 마시고, 담배도 태우고, 다시 술 마시고, 말하고 듣고, 뭔 얘기를 그렇게 했을까. 시간은 새벽 4시 50분을 지났다. 원래는 기상 시간으로 정했는데, 깨어 있었네. 그제야 잘 때가 됐다고 다들 느끼고 잘 준비를 했다. 양치를 치카치카. 여럿이 모여서 양치하더니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다락방에 누워서 그래도 일찍 일어나야지 하는 마음으로 9시 반 알람을 맞췄다.


25일 아침부터 낮
알람이 울리기 전에 잠에서 잠깐 깼다. 술 마시고 자면 꼭 중간에 깨더라. 다시 눈을 감고 자려고 하다 보니 알람이 울렸다. 9시 반. 모두 잠에 빠져있거나 깨어있더라도 누워있는 시간. 그제야 숙소의 모습이 눈에 잘 들어오기 시작했다. 침실이 두 곳. 화장실이 두 개. 거실과 부엌, 다락방, 그리고 뒷마당 테라스. 테라스에 햇볕이 산뜻하게 들었다. 뻐근하고 피곤한 몸을 풀어주려고 테라스에 드는 햇빛 안으로 들어가서 앉았다. 혼자서 이리저리 몸을 늘리고 비틀며 스트레칭했다. 숨도 크게 들이마시고, 뱉고, 그 숨소리를 둘러싼 새소리가 들렸다. 제주의 아침은 좋구나. 한 이십 분 정도 흘렀을까. 늦게까지 술을 마셨던 친구 한 명이 일어났다. 테라스에 앉아서 나는 요가하고 그 친구는 담배 피우고. 어제 처음 본 친구인데, 제법 가까운 느낌도 든 건, 역시 술이지. 지난밤에 자전거 타고 바다에 간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 물어보니 같이 가자고 했다. 자전거를 타고 바다로 향했다.
삼양해수욕장은 검은 모래사장이었다. 이런 색도 있다고 신기해 하며 구경하고, 카페에서 커피와 빵을 사 들고 바다 경치가 계단 한편에 앉아서 대화를 나눴다. 친해졌다고는 하지만, 하루 본 사이니 서로 모르는 것도 많았는데, ㅎㅈ는 이런저런 얘기를 꺼낼 줄 아는 친구였다. 자신의 얘기도 하고 내 얘기도 묻고, 작업 얘기도 나누고 바다를 보며 수영하고 싶다는 얘기도 하고. 나는 잘 안 들어가는 편이지만. 어쨌든 나란히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고,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다시 숙소로 향했다.
언덕길을 끙끙대며 돌아온 숙소에는 모두 일어나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메뉴는 돼지고기 튀김이 들어간 오일 파스타. 후추도 살살 뿌리고 미나리도 위에 올려졌다. 보기도 좋은 게 맛도 좋았다. 정근 최고... 냠냠 점심을 먹고 나서 게임 시간 전 잠시 휴식 시간. 사람들은 다시 각자 할 일을 했다. 나도 자리에 앉아서 정리할 원고를 쓱쓱 봤다. 바다에 같이 다녀왔던 ㅎㅈ는 배우로 일하고 있는데, 내가 쓰는 중인 희곡을 보여주기로 했다. 옆에서 읽고 난 ㅎㅈ는 이런저런 피드백을 해줬는데, 좋았다. 누가 읽어주고 감상을 얘기해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뭐 어쨌든 계속 써야지.
어느새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고, 룰 설명과 함께 진행됐다. 2시부터 3~4시간 정도 했던 것 같다. 각자의 전략에 따라서 말도 많이 하고 이해하고 암기해야 할 것도 있었다. 끝나고 나니 얼마나 피로하던지…. 그래도 재밌었다. 1박 2일간의 생활과 게임을 통해서 장애에 대한 경험이 독특하게 형성된 것도 같았다. 인상적인 건 ㅎㅈ와 ㅎㅂ의 모습이랄까. 저시력자 두 분(성ㅅ, ㄱㅇ)과의 관계가 이미 있는 사이였지만, 어쨌든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현재 상황과 조건을 안내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나는 약간의 어색함과 낯섦을 지니고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입장이었는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많이 배우고 생각하게도 됐다.


25일 저녁부터 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저녁때에는 제주로 취업해서 생활하고 있는 친구가 한 명 더 왔다. 함께 저녁 준비를 했고, 뭐 게임 끝났으니 다시 술이겠지. 그런데 이번에는 소주였다. 미쳤지. 진짜…. 술도 줄여야겠어... 저녁 메뉴는 육회와 가지튀김. 감태 주먹밥 등이었다. 정근이 최고…. 자리에 앉아서 술과 육회, 소주 한잔, 육회 한입, 소주 한잔, 가지 튀김 한입, 계속 마시고 말하고 듣고, 먹고 마시고. 게임이 끝났으니 보다 편안하고 속 시원하게 대화하는 모습들이었다. 식사는 식사대로 끝났고, 어느샌가 술자리로 변했던 걸로 기억한다. 술 마시고, 안주 먹고, 대화하고, 다시 술 마시고 무한 반복. 그사이에 자리로 들어가서 잘 사람은 자고, 마실 사람은 계속 마시고, 나는 왜 항상 계속 마시는 쪽일까?…. 그러던 중에 한 명이 눈물을 보이는 상황도 생겨서 마음이 출렁이는 때도 생겼고.
이번 워크숍에서 만난 ㅎㅈ, ㅎㅂ과 얘기하는 시간이 제법이나 즐거웠다. 결국 셋이서 마시고 먹고 떠들어 대며 날이 밝아왔다.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한참이나 마시고 취했는데, 담배를 피우러 테라스에 앉아 있던 때. 밤이 끝나고 흐릿하게 밝아오는 하늘이 저기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이 느껴질 때. 다들 취했는지 조용히 담배를 피우면서 각자의 내면으로 들어가니 고요하던 때. 그런 인상적인 순간이 찰나로 지나고 ㅎㅈ는 완전한 꽐라가 되었다... 남은 ㅎㅂ과 얘기하던 중에 정근이가 일어나서 셋이 다시 얘기했던 것 같은데, 나도 기억이 흐릿하다. 결국 너무 피곤해서 소파에 눕고, 잠에 들고, 오전에 사람들이 다들 비행기 타러 떠나던 것 같은데, 인사도 제대로 못 했다.


26일 아침부터 낮.
10시 반이 되어 피곤한 눈을 떴다. 숙소는 고요했고, 이제 막 성ㅅ, ㄱㅇ이 비행기를 타러 떠날 때였다. 인사를 나누고서, 숙소 정리를 정근과 간단하게 하다 보니, 퇴실 시간이 됐다. ㅎㅂ을 깨우고 우리 셋은 점심을 먹으러 향했다. 지난밤 ㅎㅂ은 비행기 시작을 늦춰서 제주에 하루 더 머물기로 했고, 나도 하루 더 있을 생각이어서 ㅎㅂ의 별장으로 가서 하루 묵기로 했다.
점심 식사는 막국수와 만두. 잠도 못 자고, 숙취도 있고, 피곤하고, 힘들고 지친 몸에 끼니를 집어넣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다 먹고서 바다를 향해 걸었다. 삼양해수욕장 근처 카페에 빈백이 있었다. 앉아서 바다 풍경을 앞에 두고 몇 시간을 누워서 잤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정근은 공항으로, ㅎㅂ과는 숙소로 다시 향했다.


26일 저녁.
별장의 위치는 스위스 마을. 지역에는 꼭 이런 마을이 있더라.…. 남해에도 미국마을, 독일마을이 있던데. 왜 만드는 걸까…. 같은 모양과 색의 건물이 주르륵 늘어진 스위스 마을은 뭔가 드라마 세트장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숙소 1층 카페 공간에서 디비져 누워서 쉬었다... 넘나 피곤했으... 그러다 저녁 식사를 하러 다시 함덕으로 고고. 함덕에서 쭈꾸미 철판볶음을 먹으며 ㅎㅂ과 이야기를 더 나눴다. 이틀간 얘기를 나눴지만, 그 시간에 한 인간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새로운 이야기도 나누고, 서사도 알게 되고, 각자의 어려움과 힘든 시기를 털어놓은 저녁 식사 자리가 됐다.
나를 찾아오는, 나에게 들이닥치는 사건들이 자신을 주저앉히고 좌절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누구나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기운을 차리고 다시 일어나서 걸을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를 필요도 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정신을 환기할 필요도 있고, 운동을 하며 몸을 쓸 필요도, 맛있는 밥을 먹기도, 여행을 떠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도, 글을 쓰며 마음을 정리하기도,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와 안전한 대화를 하기도, 심리 상담을 받기도,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을 지니기도, 사랑하는 이와 산책하기도 한다. ㅎㅂ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생각들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서 다시 숙소로 고고. 맥주를 사다가 간단하게 한잔하면서 남은 이야기를 털어 놓고는 지쳐서 잠에 들었다. 삼 일간의 피로가, 새로운 사람과 이야기의 흥미가, 하루 뒤부터 다시 찾아올 일상의 것들이, 나를 잠들게 했다.


그리고 27일
자고 일어나서 고요한 공간에 살살 움직이며 요가를 했다. 뻐근한 몸. 피곤한 몸을 다시 움직일만하게 만들어 내는 일. 서울로 돌아가면 다시 요가원을 잘 가야겠다. 스위스 마을을 둘러봤다. 아직 휴가철이 아니라 그런가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건물 사이사이에 풀이 막 자라났고, 비둘기가 건물의 중간중간 창가로 날아들어 산책하는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췄고, 붉은 꽃이 초록 잎 사이사이에 존재감을 뿜었다. 한 바퀴 마을을 둘러보니, 참 괴상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숙소로 들어와서 일기를 쓴다. 며칠간 파괴적으로 놀았다 정말…. 
이제 다시 제자리에서 글을 쓰고, 요가를 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해야겠다. 즐거운 시간과 새로운 인연이 생긴 것, 잘 모르는 행동을 경험한 것, 멋진 친구의 작업에 참여한 것,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기억할 장면이 생긴 것, 초여름의 제주를 바라본 것. 오늘 밤 비행기에서 잘 갈무리해야지.